
죽은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면, 그게 과연 위로가 될까요? 저는 처음 이 영화의 줄거리를 들었을 때 솔직히 '그런 게 위로가 되겠어'라며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상자 속의 양'은 AI와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상실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감정에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부와 휴머노이드 렌탈이라는 설정
영화의 배경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코모토 부부는 아들 카케루를 납치로 잃습니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을 조금 미뤘다는 이유 하나로, 평범한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사건입니다. 저는 이 도입부에서 이미 숨이 막혔습니다. 카페 매니저로 일하면서 익숙했던 직원이 갑자기 그만두거나 오래된 단골손님이 어느 날 사라지는 경험을 해봤는데, 그 빈자리의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잃는다는 건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라는 감각만큼은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부부는 이후 '리버스'라는 업체를 통해 카케루의 외형을 본뜬 휴머노이드를 집에 들입니다. 여기서 휴머노이드란 인간의 신체 구조와 외형을 모방하여 제작된 로봇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람처럼 생긴 기계인데, 영화 속 휴머노이드는 단순 복제품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행동 방식과 반응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설정은 SF 영화에서 기술의 발전이나 윤리 문제를 다루는 데 활용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영화를 봐보니 고레에다 감독은 기술 자체보다 '이 기계 앞에서 인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에 훨씬 더 집중합니다. 기술적 설명은 최소화하고, 감정의 결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 이 감독 특유의 연출입니다.
부부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 아야세 하루카가 연기한 오토네는 모성애를 바탕으로 휴머노이드를 적극 수용하며, 죽은 아들의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붙잡으려 합니다.
- 코라 켄고가 연기한 켄스케는 아들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휴머노이드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 하지만 켄스케 역시 영화 중반부로 갈수록 내면에 쌓인 그리움이 감정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대립 구도 자체가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 짓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휴머노이드가 드러내는 인간다움의 경계
영화 속 핵심 상징은 집 마당에 심어진 나무 한 그루입니다. 부부는 카케루의 영혼이 그 나무에 깃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목재소 할아버지가 휴머노이드에게 "나무를 마주하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인격적 상징으로서의 나무를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인간이 얼마나 상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그 믿음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든다면 그것은 충분히 실재하는 힘 아닐까요.
한편 영화는 휴머노이드의 한계도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충전 제한, 물에 대한 취약성, 음식을 섭취할 수 없는 신체 구조 등 물리적 제약이 존재합니다. 더 중요한 건 감정적 한계입니다. 사과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절대적 정답 외의 상대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는데, 이는 인지 공감(Cognitive Empathy)의 부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인지 공감이란 타인의 입장과 맥락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 능력을 통해 "틀린 말이지만 이해한다"는 복잡한 반응을 할 수 있지만, 휴머노이드는 그 사이의 간격을 메우지 못합니다.
켄스케가 휴머노이드에게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도록 학습시켰다가 경찰 조사에서 이 대답이 그대로 나와 곤경에 처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며 느낀 건, 기계는 맥락이 아니라 명령을 기억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이 쓰인 상황과 감정인데, 휴머노이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벽에 부딪힙니다.
영화 속 책에 등장하는 문구, "상자 속의 양은 원하는 것에 따라 변한다"는 결국 휴머노이드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이 문구는 프로젝션(Projection), 즉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심리적 기제를 암시합니다. 여기서 프로젝션이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상대방에게 덧씌워 인식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오토네가 휴머노이드에게서 카케루를 보는 것, 그 자체가 이 프로젝션의 가장 솔직한 표현입니다.
심리학계에서는 상실 후 애도 과정을 다섯 단계로 설명하는 '퀴블러-로스 모델'이 널리 쓰입니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로 이루어진 이 모델에서 켄스케는 부정과 수용 사이를 오가고, 오토네는 협상의 단계에 오래 머뭅니다. 영화가 직접적으로 이 개념을 언급하지 않아도, 두 인물의 반응은 이 모델이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 반응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결말의 아쉬움과 이 영화가 남기는 질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무도 모른다', '브로커' 등 일관되게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에 질문을 던져온 감독입니다.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 즉 이야기가 갈등에서 해소로 이어지는 구조의 측면에서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열린 결말이나 잔잔한 봉합을 선택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아크란 서사가 시작, 전개, 절정, 해소의 흐름을 통해 완성되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영화도 전반부와 중반부까지는 그 흐름이 묵직하게 쌓입니다.
그런데 저는 결말부 20분에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복선을 회수하긴 하지만, 급작스러운 전개가 그때까지 공들여 쌓은 감정적 밀도를 무너뜨린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다 된 밥에 모래를 뿌리는 것처럼, 충분히 완성될 수 있었던 이야기가 마지막 순간에 흐트러집니다. 일반적으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결말이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제 경험상 그 기대가 완전히 충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반에 깔린 질문들은 오래 남습니다. 일본 영상문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이 꾸준히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다루는 주제가 특정 시대나 문화를 넘어 보편적 감정에 닿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AI와 인간의 차이보다 '관계란 무엇인가'를 더 오래 생각했습니다. 휴머노이드가 다시 반납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는 설정은, 사랑받고 싶고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감정과 너무 닮아 있어서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기억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SF 영화를 기대하고 들어가면 실망할 수 있지만, 가족과 상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이라면 충분히 볼 만한 작품입니다. 결말의 아쉬움을 감수하고도 남는 감정이 있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