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영화가 로봇 SF물이라고 생각하고 보다가, 중반부에 조용히 멍해진 적이 있습니다.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2021)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영화였습니다. 기술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 가족, 그리고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칸이 주목한 SF영화, 그런데 SF가 아니다
'애프터 양'은 제74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자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입니다. 숫자만 보면 화려한 이력이지만, 막상 영화관에 앉아 보면 처음 30분은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입니다. 주인공 제이크(콜린 파렐)의 가족은 문화 동반자 안드로이드인 양(저스틴 H. 민)과 함께 살아갑니다. 여기서 '문화 동반자 안드로이드'란 단순한 가사 보조 로봇이 아닌, 특정 문화권의 정체성을 매개하도록 설계된 인공지능 존재를 의미합니다. 양은 입양된 딸 미카에게 아시아계 뿌리를 연결해주는 역할로 가족 안에 들어온 존재입니다.
그런데 양이 갑자기 작동을 멈춥니다. 영화는 그 이후를 따라갑니다. 수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제이크는 양의 내부 기억 장치에 접근하게 됩니다. 여기서 '기억 장치'란 양이 살아온 시간 동안 스스로 선택하여 저장해온 장면들의 집합체로, 쉽게 말해 양이 소중하다고 여긴 순간들의 기록입니다. 이 기억들을 하나씩 열어보는 장면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제이크는 그 기억들을 통해 비로소 양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이건 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감각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단골손님과 쌓아온 작은 기억들, 동료와 나눈 사소한 대화들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 기억들을 누군가 들여다본다면 과연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인간중심주의를 거스르는 영화의 시선
이 영화가 기존 SF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인간보다 열등하거나, 혹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클론 에이다(헤일리 루 리처드슨)는 양이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다른 존재들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아주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이 한 마디가 영화 전체의 철학을 관통합니다.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에 대한 정면 반박입니다. 여기서 인간 중심주의란 인간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자연이나 비인간 존재를 인간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영화는 이 주제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로 전달합니다. 자율주행 차 안에서 LED 빛이 반짝이는 터널을 지나는 제이크와 미카의 모습이 어항 속 물고기처럼 보이는 장면이 그 예입니다. 제이크가 가루차 대신 잎차를 마시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의 원재료(뿌리)보다 우려낸 결과물인 차 자체가 중요하다는 은유로, 출신이나 혈통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입니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영화는 감각을 변화시키고, 감각은 지각을 바꾸며, 지각은 사고를 바꾸고, 사고는 행동과 삶을 바꾼다"고 말했습니다. '애프터 양'은 그 말이 가장 잘 맞아 떨어지는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이크가 영화 한 편에서 받은 영감으로 차(茶) 관련 직업을 선택했다는 설정 자체가, 영화의 힘에 대한 감독의 직접적인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애프터 양'이 보여주는 핵심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비인간 존재(AI, 클론)를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 묘사합니다.
- 혈통이나 뿌리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로 제기합니다.
- 기억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영화를 보는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고, 관객 스스로 성찰하게 만듭니다.
기억의 소중함, 카페에서도 매일 느끼는 것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머릿속에 맴돈 장면은 사실 거창한 철학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양이 가족사진을 찍는 순간, 곧 작동을 멈출 것을 예감하는 듯 조용히 서 있던 그 표정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이상하게도 카페 문 닫기 전 혼자 정리하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단골손님이 오지 않게 되거나, 오래 함께 일하던 직원이 그만두는 일이 생깁니다. 그때서야 그 사람이 만들어준 일상의 밀도를 실감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사람일수록 그 빈자리가 더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양이 멈추고 나서야 가족이 그 빈자리를 실감하는 영화의 전개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영화 속 제이크가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서사 구조 측면에서도 독특합니다. 기억 장면 안에서 키라가 왼쪽, 양이 오른쪽에 앉아 대화하는 배치는, 결국 인간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구도입니다. 미메시스(mimesis), 즉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고 관객이 그 반영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구조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미메시스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 예술론의 핵심 개념으로,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코고나다의 작품은 시각적 구성주의(visual constructivism)의 관점에서 자주 논의됩니다. 시각적 구성주의란 화면 속 공간 배치와 색, 움직임이 감정과 의미를 직접 구성한다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애프터 양'은 대사보다 화면이 먼저 말하는 영화입니다. 칸영화제 공식 선정 기준에서도 이 영화의 미장센(화면 구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국내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예술영화 관람객의 만족도가 상업영화에 비해 장기적 여운과 사후 성찰 측면에서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애프터 양'을 보고 며칠 후에도 계속 무언가를 곱씹게 되는 경험이 저에게도 정확히 그랬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로 집에 돌아와서 가족에게 연락했습니다. 딱히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그게 이 영화가 저한테 한 일이었습니다.
느린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망설임 없이 추천합니다. 반대로 강한 사건 전개를 기대하고 보신다면 전반부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느린 호흡을 견디고 끝까지 보고 나면, 무언가 조용하게 바뀐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걸 좋은 영화의 조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